Q. 현재 하시는 활동을 기반으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동화엔텍의 회장으로서 근무하고 있는 김강희입니다. 1956년 국립한국해양대학교 기관학과를 졸업한 후 바다와 육지를 오가며 20년 가까이 경력을 쌓았고, 1974년 종합해사 설립을 시작으로 많은 사업을 거쳐왔습니다. 1980년 선박에 들어가는 열교환기를 국산화해보자는 마음으로 ㈜동화엔텍을 설립하면서 여기까지 이어졌습니다.
Q. 100세 시대가 당연하게 자리 잡은 현시점에서 회장님의 건강과 장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알려진 연세로 올해 아흔둘이신데, 현재 해운업계에선 회장님을 포함하여 해운업의 최고 위치, 리더 그룹에 계신 원로 해기사께서 나이가 무색하게 왕성한 커리어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회장님의 개인적인 건강 관리 비결이나 근속의 노하우를 여쭤봐도 될까요?
우선 업무를 손에 놓지 않는 것이 큰 비결 같습니다. 업무라는 게 특별하지는 않아요. 내가 하는 업무는 항상 동화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집무실의 이름이 “미래를 생각하는 방“입니다. 요새 젊은 친구들이 싫어할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친구들과 얘기하는 게 저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는 제 나이를 알고 제 직책을 ‘명예직’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저는 매일 ㈜동화엔텍의 직원으로 현장에서 맡은 직무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매일 한 시간 정도를 걷습니다. 이게 7천 보가량 됩니다. 아주 많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Q. 해사대학인 국립한국해양대학교를 수학하기로 마음 먹으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었고, 저를 포함한 자식이 일곱이나 됐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항상 강조한 말, 그리고 지금의 저도 놓지 않는 말이 바로 ‘기술’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항상 기술이 있어야 사람이 먹고 산다 말씀하셨습니다. 저 또한 소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공대를 가려고 준비중이었죠. 그런데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 소재 대학들이 전부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말하자면 지역에 연합대학이라는 형태로 분산됐습니다. 저는 분산된 연합대학이 다시 서울로 모이기 전 국립한국해양대학교를 지원한 겁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오셔서 하는 말씀이, 군산에 한국해양대학이 내려와 있는데, 거길 먼저 경험삼아 응시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7형제를 다 가르치려면 아버지 입장에선 보통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해양대학은 국비로 다닐 수 있고요. 거기다 해양대학 역시 전문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이죠. 그래서 아버지가 저를 설득하기를, 해양대학이 다른 공과대학보다 먼저 시험을 치르니까 시험 연습차 응시해 보라고 하신 겁니다. 일리가 있어서 해양대학에 응시했습니다. 경쟁력이 당시 어마어마했습니다. 17 대 1 정도 됐으니까 말입니다. 학비 내고 살기가 어려우니 전국에서 응시한 거죠.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합격했고, 더 이상 시험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말뚝 박기로 결심했죠(웃음). 군산에서 1년을 보낸 후 부산으로 옮겨왔고, 그 때 당시 건물이라기보다 허름한 텐트를 쳐놓았고, 교과서도 교수님들이 읽은 외국 교재를 번역한 제본을 사용했죠. 어렵게 공부하던 그 일도 이제는 추억이 됐습니다.
Q. 그러고보니 지난 호에 인터뷰하신 제이에스엠인터내셔날 변재철 회장님과는 오랜 세월 동문수학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해운계에서 두 분께서 귀감이 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네, 변재철 회장과는 중학교 동창으로 만났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틀어 6년, 그리고 국립한국해양대학교에서 또 4년간 함께 지냈으니 총 10년을 알았습니다. 비교적 이 사람하고는 업무상 가까이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특히 종합해사 이후 다른 사업을 진행할 때 변 회장과 만날 일이 잦았습니다. 요즘도 자주 보고 싶으나, 볼 일이 한국해양대 관련 일이 아니면 보기 힘드네요. 해양대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겨 자주 봤으면 좋겠습니다.
Q. 이후 창립하신 종합해사가 어느덧 51주년이 되었습니다. 2024년에 발간된 『종합해사 50년사』에는 우리나라 선박수리 기술이 낙후되어 해기사들이 벌어온 외화가 외국계 수리업체로 역 유출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선박 수리 전문업체를 창업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요. 종합해사의 생생한 창립 일화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졸업 후의 일화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해운공사(현 한진해운)에 들어가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노력의 대가였는지 졸업하자마자 배에 오를 수 있었고, 승진도 잘 되어 기관장까지 달았습니다. 그러다가 연가를 받아서 쉬는 중에 육상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자재과에서 근무했고, 다시 배에 올랐다가 돌아와서 해무과에 갔습니다. 해무과 다음에는 공무과의 차장으로 발령되어 공무부장까지 지냈습니다. 20년 정도를 그렇게 배와 육지를 오가며 일했습니다. 요즘 말하는 ‘육·해상 순환 근무’에 가까운 형태입니다.(웃음) 공무부장으로 일하다 보니까 일을 보는 시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배는 4년에 1번 정기 검사를 진행하고, 1년에 한 번 수리하잖습니까. 이 과정에서 당시 우리나라의 선박수리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못했다 보니 배를 외국에서 수리해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했습니다. 외국 선박이 들어오면 1~2주 정도 국내에서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선박 대부분이 최종 수리는 이웃 일본이나 싱가포르로 가서 진행했죠. 우리나라 해기사들이 기껏 벌어온 외화가 도로 밖으로 나가는 양상이 보였습니다. 그 부분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다 우리나라에서 선박수리업체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해상에서 기관장으로 지낸 경력과 육상에서 공무과를 다닌 경험이 있으니 보인 거고, 마음먹은 겁니다. 함께 고민하던 업계 종사자에게 ‘수리를 우리가 해보면 어떻느냐’ 설득했죠. 총 33명이 모여서 각자 자금도 모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사장직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총대를 매려고 하지 않았어요. 돈은 모였지, 조바심은 나지. 사람과 돈만 모이고 1년 가까이를 지지부진하다가 누군가가 “네가 하자고 제안했으니 네가 책임져야 하지 않느냐” 말한 거죠. 그렇게 반 울며 겨자 먹기로 종합해사의 대표가 된 겁니다.(웃음)
Q. 나아가 1980년엔 선박용열교환기 수리업체인 ㈜동화엔텍을 창업하셨습니다. 종합해사 창립 6년 뒤 새로운 창업을 하셨는데요.
㈜동화엔텍은 열교환기를 시작으로 압축기, 그리고 지금은 열교환기와 압축기((주)동화뉴텍)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템 Package 제품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종합해사에서 선박수리업을 계속하다 보니 남이 이미 만든 선박을 수리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이제는 선박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허름한 창고를 임대해 직원 3명과 함께 열교환기 수리를 시작하면서 동화엔텍의 전신인 ㈜동화정기를 설립했습니다. 회사 설립 2년 뒤에는 쌍용중공업(현 STX조선) 국산화 엔진 1호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국산 엔진 생산에 기술로 참여한 일이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습니다. 일본에서 수리하는 것보다 신속하고 비용 또한 저렴하다 보니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나라의 조선업이 급성장하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회사도 규모를 키웠습니다. 영도를 떠나 반여동, 양산, 다대포 등지로 공장을 키우며 옮겨 다니며, 2000년대 녹산 사업장을 열고, 2012년 화전사업장을 시작하면서, 성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2014년엔 ‘월드클래스 300’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스템 제품 개발에 집중하였고, 친환경선박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 2020년 LNG 연료공급시스템(FGSS)을 공급하게 되면서, 열교환기를 넘어 시스템 기업으로 성공적 전환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창립 이래 세웠던 모토는 ‘기술만이 살 길이다’입니다. 이 모토로 연구개발과 성능개선, 신제품 개발에 주력해 왔습니다. 아버지가 하신 말 그대로요. 돌이켜 보면 사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제가 몸담아 온 해기사로서의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왔고, 지금도 ㈜동화엔텍의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니 여전히 기술에 기반하여 새로운 일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Q. 곧 승선할 후배 해기사들은 100세를 넘어 120세 시대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회장님의 시대보다도 더 오래 직업 활동과 노후를 고민할 세대인데요. 장기 승선 여부와 경력 관리를 고민하는 젊은 후배들에게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삶을 설계하고 살아 나가야 할까요?
100세 시대를 사는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기회를 잡아 일찍이 배에 올랐고, 기관장으로의 승진도 빨랐습니다. 배에서 이런 커리어를 20년 가까이 쌓으니, 육상의 사업으로 연결할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임하는 직업에 필요한 ‘기술’을 충분히 갖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장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한다 하더라도, 혹은 관심을 가지지 않더라도 스스로 즐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혹자는 저에게 명예회장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저는 이 회사의 한 직원입니다. 직원으로서 회사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화엔텍은 제 일생을 두고 일군 기업이고, 그 이전에는 해기사로서 해기사의 일에 전념했습니다. 청년 여러분께서 초조하게 생각하시는 것보다 시간은 많습니다. 길게 바라보시고 기술에 완벽해질 때까지 숙련하시기를 바랍니다.
Q. 그렇다면 국립한국해양대학교 기관학과에서의 修學과 과거의 승선 경험이 이후 육상생활의 경력과 직업 활동, 나아가 노후 준비에 도움이 된 걸까요?
그렇습니다. 해기사는 직업적으로 꽤 매력이 있는 직종입니다. 수입도 그렇지만 독보적인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해기사’라는 타이틀 덕분에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지금 제 사업 또한 제가 한때 종사한 기관장, 공무부장이라는 직업과 연계하지 않았습니까. 해기사가 아니었다면 과연 오늘의 제가 있었을까요? 그걸 실감할 때마다 해기사라는 제 일부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것이 제 밑천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 나이에서, 젊었을 때 종사한 일을 지금까지 연결하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그걸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죠.
Q. 향후 회장님의 비전 및 계획이 궁금합니다.
제가 호를 사용하거나 사회 공헌을 기사화하는 일은 잘 하진 않습니다. 그것으로 특별한 유명세를 타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꾸준히 하는 이런 공헌 활동이 일관성 있게 정리되어야 하다 보니, 장학재단을 만들 생각은 있습니다. 또한 어느 정도 지나온 역사를 후진들한테 남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초안 작업 중입니다만, 90%는 완성되어 있습니다. 종합해사를 비롯한 회사의 설립 일화, ㈜동화엔텍을 키워온 과정을 후배들한테 전달할 생각입니다. 사실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노력하여 일생을 이룬 과정입니다. 하지만 같은 길을 걸으려는 후배들한테는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겁니다. 써놓지 않으면 희미해지니까요.